확산되는 증언, 공명하는 사람들
1991년 11월 밤, 황금주는 김학순이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는 것을 텔레비전으로 본다. 다음 날 아침 텔레비전에서 본 김학순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였고, 김학순이 가르쳐 준 대로 신고를 한다. 이후 황금주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서 이 문제를 알리는 데 발 벗고 나서게 된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제기되던 1990년대 초부터 건강이 악화되기 전인 2000년대 중반까지, 늘 운동의 자리를 지켰던 황금주가 일관되게 요구했던 것은 일본 정부의 사죄였다.
“그리고 92년 그 사람한테도 가서도 그랬어 일본서 사죄하고 사죄 위에다가 내 청춘 돌려주시오 그렇게 말해주시오 그랬다고 그러니까 하는 말이 청춘을 어떻게 돌려줍니까 나는 청춘을 돌려주면 받습니다 그런데 돈 그 씨알따나 안 받습니다 몸값 받았다고 그러기 때문에 안 받습니다 내 청춘 돌려 달라고 사죄하고 사죄 위에다 내 청춘 돌려주면 감사하게 받습니다 이랬다고 그래서 외국 나가면 아~ 그 청춘 돌려달란 할머니 그럼 다 알아 이름 부르면 잘 몰라 내 청춘 돌려 달란 할머니는 내 하나밖에 없어 다 돈이야 서푼을 받든 한푼을 받든 다 돈이야 지금.. 난 싫어” - (녹취록, Tape 6-3 1420)
일본 정부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고 한국 정부는 소극적으로만 대응하던 1990년대 초, 황금주는 UN 인권소위원회를 비롯하여, 도쿄, 오사카, 워싱턴, 하와이, 뉴욕, 토론토 등 세계 여러 도시를 방문하여 일본의 전쟁 범죄를 규탄하고 피해를 증언했다. 고령의 나이에 20여 개국이 넘는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이야기를 하니까 덜 속상하다고, “그전에는 속상해서, 가슴이 뽀개지고 찢어지는 것 같아서 밥을 못 먹었는데, 지금은 밥을 먹는다”¹고 말한다. 황금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진실이 밝혀지고 역사가 새로 쓰이길 희망했으며,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증언하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지금 마지막이니까 할 거야 일본 정부에서 그래도 내가 가서 저거야 국회의원 두들겨 패는 놈 나 하나밖에 없어 국회의원 여자 두들겨 패고 국회의원 두들겨 패고 국회원가서 데굴데굴 구르는 여잔 나밖엔 없어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정부는 안죽까지도 일본놈들한테 매달려서 지랄한다고 일본 놈 말이라면 꺼뻑 돼져 그 왜정 때 그만큼 저걸 했으면 당당한 기운이 있어야 할 텐데 없어 지금까지도.” (녹취록, Tape 6-3 0934)
황금주의 증언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발했고, 워싱턴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WCCW), 노라 옥자 켈러의 소설 『종군위안부(Comfort Women)』(1997), 뉴욕시립대 민병갑 교수의 연구서 『한국인 ‘위안부’(Korean “Comfort Women”)』(2021) 등으로 이어졌다. 황금주의 증언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에 나서게 한 것이다.
1992년 11월 24일 미국 버지니아주 워싱턴한인교회에서의 황금주의 증언 이후, 1992년 12월 12일 워싱턴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Washington Coalition for Comfort Women Issues, 워싱턴정대위)가 결성되었다. 워싱턴정대위는 주미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고 미국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증언 및 사진 전시회를 하는 등 미국 사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왔다. 특히 2007년 미국 하원이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해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미래세대에 대한 역사교육을 요구하는 결의안(HR121)을 통과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난 2020년 28년간 미국 워싱턴DC를 중심으로 진행된 일본군‘위안부’ 문제 관련 운동의 과정과 성과를 담은 책 Comfort Women: A Movement for Justice and Women’s Rights in the United States (eds. Jung Sil Lee and Dennis Halpin, HOLLYM, 2020)을 발간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전쟁 범죄와 여성 인권의 문제로 국제사회의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면서, 이와 관련한 초국가적인 연대도 이루어졌다. 황금주는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 및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중국, 대만, 필리핀, 북한 등 여러 국가 출신의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들과 만나고, 함께 일본 정부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고통을 나누는 피해자들의 연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2000년 9월 한국, 중국, 타이완, 필리핀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15명과 함께 미국 워싱턴 D.C. 연방 지방법원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집단 소송을 제기하는 등 법적 투쟁도 지속해나갔다.
이 외에도 일본군‘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문제, 일본의 교과서 왜곡 문제 등에도 목소리를 내며 군국주의에 맞서는 활동을 전개했고,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반대,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 반대에도 함께하며 평화운동을 이어갔다. 역사 기록 및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건립에도 큰 힘을 보탰다.
황금주 할머니께서 호소하신 것은
“일본군‘위안부’의 피해 사실을 인정하라.”
“처녀공출이 ‘천황’의 명령으로 이루어졌으니 일본 ‘천황’이 사죄하라.”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사실을 일본 젊은이들에게 전하라.”는 세 가지였다.”
- 야스다 치세, 「황금주 할머니의 소망과 싸움」, 『역사와 책임』 4, 2013, p.174
황금주의 이야기는 『모래시계가 된 위안부 할머니』(이규희, 2010)라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2012년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소설로는 처음으로 일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에밀리 정민 윤 지음, 한유주 옮김, 열림원, 2020)에도 다른 일본군‘위안부’들의 증언과 함께 황금주의 이야기가 시의 형태로 실려 있다. 1992년 “이날까지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를 세계에 폭로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사실을 전할 수 있게 되어 큰 영광”²이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황금주는 여전히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1) 녹취록, Tape 6-3 1325
2) 『관악신문』, 1992.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