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의 위안소 생활
그 순사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지내다가 이제 딴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라며 넘겨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을 먹이고 입힌 값을 얹어서 받고 판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나선 길은 전라도 광주를 지나, 전주를 거치며 서른 명으로 늘어난 다른 여성들과 함께 만주로 향했다. 일행 중 가장 어렸고 글도 몰랐던 최갑순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따라가야 했다. 서울에서 만주로 들어갈 허가를 기다렸다가 기차를 타고 두만강가에서 내렸고, 그곳에서부터 바로 포장을 치고 ‘손님’을 받았다. 거기에서도 허가장을 붙인 간판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1~2달을 보내고, 헌병 본서에서 영업 허가가 나오고서야 동안성에 들어갔다. 동안성에는 처음에는 군인들만 있었으나 농사지을 사람들을 데려와서 곧 동네가 만들어졌고, 근처에는 ‘요릿집’이 많았다.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여러 부대에서 번갈아 나오는 것 같았다.
당시 아직 생리도 시작하지 않은 열다섯의 나이였던 최갑순은 ‘손님’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언니들을 따라서 ‘일’을 시작했고, 아직 어리고 나이에 비해 몸도 왜소했기에 많이 아팠다고 한다.
“인자 내가 열입곱살 먹으니께로 인자 덜 아파요.
인자 그런 것도 알고, 경도가 나오니께는 그도 인자 안 아파, 덜 아파.
그래도 큰놈 앵기면은 아파 죽겠어. 아파 죽겠어.
가슴이 터질려고 하고, 아래가 미어 터지려고 하고, 빠지려고 하고.”
- (T13-5 35:20-35:45)
‘위안소’ 주인은 중간에 바뀌기도 했는데, 최갑순은 손님에게 돈을 받거나 이불 빨래를 해주고 돈을 벌면 다 주인에게 가져다 주었다. 주인이 자신의 몸값이 당시 돈으로 15만 원이니 이를 갚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밥 먹이고 옷 입히고 여기까지 데려온 차비를 갚아야 하니, 돈을 벌어야 한다면서 ‘손님’을 제대로 못 받으면 혼내고 때렸다. 그리고 돈을 가져다주면 “고맙다. 너는 마음씨가 옳은 게로 이리 병도 안 나고 잘 허고 있응께로 좋다”³고 따뜻하게 대해주고 ‘호강’을 받았다. 돈 다 갚으면 고향으로 보내준다는 말을 믿고, 그렇게 나를 “치사해주는 것이 좋아서” 뭐 하나 사 먹거나 장에 나가보지도 않고, 그렇게 해방이 되던 스물여섯 살 때까지 10여 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8월의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주인과 일하던 사람들 모두 온다간다 없이 사라졌다. 남은 사람들끼리 밥을 해먹고 있으니 ‘일본놈’들이 졌다는 소식이 들렸고, 소련군인들이 내려와서 여자들을 강냉이밭으로 끌고 가서 겁탈했고, 중국 사람들은 자신에게 못되게 굴었던 조선사람들을 죽였다.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어서 사람들을 따라서 남쪽으로 향했고, 고향 말 쓰는 사람을 찾아 같이 가자고 부탁하며 이동했다. 걸어서 두만강을 건너고, 두부 장사, 아편 장사를 하며 차비를 벌어서 4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3) 안해룡 촬영 별도 면접조사(19990619:19990630) 녹취록-2차 면접 앞부분 p.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