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부재판: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의 투쟁과 연대
1991년 이순덕은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이하 ‘광주유족회’로 약칭)에 처음 자신의 피해를 신고한다. 이모와 남동생, 그리고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위안소 생활을 친구에게 털어놓았는데, 그 친구가 광주유족회의 이금주 회장을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92년 3월 27일 이순덕은 정부 적십자사에 피해 신고를 하고, 1993년 12월 13일 ‘부산 「종군위안부」·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죄청구소송’의 2차 제소 원고로 참여하게 된다. 이순덕이 처음 피해 신고를 했던 이금주는 관부재판에 참여하는 내내 후견인, 통역자로서 이순덕과 동행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보건대, 이순덕은 이금주에게 상당히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산 「종군위안부」·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죄청구소송’(이하 ‘관부재판’으로 약칭)은 1992년 12월 25일 부산 지역의 ‘위안부’ 및 근로정신대 피해자가 중심이 되어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지부에 일본국을 상대로 국가배상법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이다. 일본군 ‘위안부’ 및 여자정신대원이었던 원고들은 일본의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로 입은 피해에 대하여 전후보상의 일환으로 일본국이 국회 및 UN총회에서 공식사죄를 하고 원고에게 손해배상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약 5년 5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23회의 재판 끝에 1998년 4월 27일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지부는 원고들이 주장한 일본국의 배상책임 가운데 ‘입법부작위에 의한 국가배상책임’만을 인정하였다.
원고가 국가 배상의 근거로 주장한 ‘도의적 국가로서의 의무’에 대하여 재판부는 일본국의 헌법이 제국 일본의 군국주의와 이에 따른 식민지, 점령지배에 대한 반성과 개혁의 의도 하에 존립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피해자 개인에 대하여 직접적인 사죄와 배상을 명하여 그에 대한 입법 의무를 일본국에 부과하고 있다고까지 해석할 수는 없다고 판시하였다. 다만, ‘위안부’ 제도가 중대한 인권침해이고, 이로 인한 여성들의 손해가 방치되는 것은 새롭게 인권침해를 일으키는 일이므로, 일본군의 직·간접적인 관여를 통해 ‘위안부’ 제도가 설치·운영되었음을 인정한 1993년 내각관방장관 담화(고노담화) 이후에는 ‘위안부’ 원고들이 입은 손해를 회복하기 위한 배상 입법의 과제가 의무로서 제기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판결 시점에서 보건대, 입법이 이루어져야 할 합리적인 시간이 경과하였으므로 일본 국회가 입법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입법부작위)에 대한 국가배상법상 위법성이 인정된다고 보았다. 이에 야마구치 지방재판소는 일본국이 원고들에 대하여 각 30만 엔 및 이에 대한 지연 이자를 지급하도록 명하는 판결을 선고했다.
이러한 판결에 대하여 피고 일본국측이 항소하여 재판은 히로시마 고등재판소로 옮겨갔다. 그러나 2001년 3월 29일 히로시마 고등재판소는 1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원고의 주장뿐 아니라 1심에서 인정된 입법부작위에 의한 손해배상책임조차 번복하였다. 헌법 해석상 ‘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보상의 입법의무가 명백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2심 재판은 원심판결을 취소하고 원고들에게 패소판결을 선고하였고, 이에 원고는 또 다시 상급 재판소에 항소하였다. 그러나 최고재판소는 2003년 3월 25일 상고 불수리 즉, 사건 자체를 다루지 않고 기각하였다. 이로써 1992년 연말에 시작된 관부재판은 약 십 년 만에 원고들의 주장이 모두 배척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¹ 고령의 증언자들이 한국과 일본을 왕복하며 성적 피해를 수차례 증언한 결과로서는 참담한 패배였으나, 1심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의 판결은 ‘위안부’ 피해자의 진술을 사실로 인정한 것으로 현재까지 일본에서 제기된 한국인 ‘위안부’ 관련 소송 가운데 피해자들의 주장이 일부나마 받아들여진 유일한 판례로 남아 있다.
“위안부원고들은, 자신이 위안부였던 굴욕의 과거를 오랫동안 감추어오다가 본소(本訴)에 이르러 처음으로 그것을 명백하게 밝혔다는 사실과 그 중요성에 비추어 보면, 본소에서의 동 원고들의 진술과 공술은 오히려 동 원고들의 지우기 어려운 원체험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 신용성은 높다고 평가되며, 위와 같이 반증이 전혀 없는 본건에 있어서는, 이것을 모두 채용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등에 관한 일본 야마구치 지방 시모노세키지부 판결」(1998.4.27.), 김창록 옮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편, 『정신대자료집X 시모노세끼 재판 평석회』, 1998.6.27., p. 53.
또한, 관부재판은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단지 적대와 투쟁만이 존재했던 것이 아님을 보여준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1992년 12월 25일 관부재판 제소 소식이 처음 일본 신문과 TV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바로 이튿날 관부재판 지원 모임의 설립을 준비하던 시민 10명 정도가 원고들을 후쿠오카로 초대하여 환영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전후 책임을 묻는다·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이하 ‘지원모임’으로 약칭)의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했던 하나후사 에미코(花房恵美子)는 ‘종군 위안부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후쿠오카’를 결성하여 공부 모임을 하고 있던 중에 재판 지원 요청을 받아 생업까지 축소해 가면서 지원에 나서게 되었다고 한다.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김문숙을 비롯한 한국의 지원자들과 원고들, 그리고 지원모임의 회원들은 재판이 끝나면 보고 집회와 교류회 등을 가졌다. 재판이 히로시마 고등재판소로 옮겨간 후에는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연락회’가 히로시마와 후쿠야마, 그리고 히로시마현 북쪽의 미요시에도 만들어져 연대의 고리가 확산되었다.
하나후사 에미코는 지원모임을 다양한 사람들이 가능한 만큼의 시간과 능력을 나누며 전개되어 온 시민운동으로 기억한다. 재판 지원을 위한 활동들, 예컨대 차량 운전, 재판 방청, 보고 집회, 교류회 개최, 회보 제작, 원고 쓰기, 가두 서명 운동, 플랭카드 제작, 의원들과의 면담, 공부 모임 운영, 활동 홍보 등 여러 사람의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 전담자도 없이 각자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누군가 떠나가면 누군가 새롭게 찾아오면서, 누군가 요청하면 누군가 응답하면서 운동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열세 살 소녀로 시모노세키에 근로정신대에 동원되었다가, 50년 후 할머니가 되어 사죄와 미지급 임금을 받기 위해 다시 이 땅을 밟게 되었다’라는 한 원고의 발언은 관부재판을 일본사회에 알리며 널리 회자되었다. 여기에 일본의 지원자들이 화답함으로써 관부재판은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에 식민지배와 수탈, 그리고 투쟁의 역사 외에 공감과 연대의 기억을 남겨 놓는 사건이 될 수 있었다.²
1) 관부재판의 법적 쟁점 및 판결의 의미에 관해서는 김재영, 「일본에서의 일본군 위안부 소송」, 『일본군 위안부 문제 - 법적 쟁점의 정리와 최근 동향의 분석』, 민족문제연구소, 2009를 토대로 작성함.
2) ‘전후 책임을 묻는다·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및 관부재판 지원 단체에 관해서는 하나후사 도시오 · 하나후사 에미코, 고향옥 옮김, 『관부재판』, 도토리 숲, 2021, pp. 24~25, 62~64, 101~102, 261~217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