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증언, 부재하는 이름
이순덕은 1918년 10월 20일 가난한 집의 맏딸로 태어났다. 소작할 땅도 얻지 못했던 부모님은 삯일을 하여 겨우 생계를 이었고, 가난한 살림살이에 이순덕과 그녀의 남동생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1937년 봄 이순덕이 저녁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나물을 캐고 있을 때, 30~40대의 남자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신과 옷을 주는 곳에 데려다 주겠다며 이순덕에게 접근했다. 이순덕은 배가 고파도 어머니 아버지가 있으니 따라가지 않겠다 했지만, 남자는 막무가내로 잡아끌었다. 이순덕은 그렇게 남자를 한참 따라가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끝내 이순덕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훗날 해방이 되어 돌아왔을 땐 부모님이 이미 세상을 등진 후였으니, 이순덕은 부모와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영영 이별하고 말았다.
긍게 그 언덕에서 쑥을 캥게 어떤 남자가 군복을 입고 와. 그래 날 보고 ‘아가’ 그래. 그래 내 암말도 안코 이렇게 하고 있응게, ‘머 할라고 이런 거 캐냐’ 그래. 그래서 ‘이게 밥이다고 우리는’ 그랬제. 그랬더니 ‘이런 거 먹지 말고 나 따라가면은 좋은 밥에다가 신발, 옷도 좋은 넘 주고 돈도 많이 주고 그렁게 가자’ 그려. ‘절대 안 간다’고 ‘나는 우리 아부지 어무니가 있응게 안 간다’고 긍게 가자고 열일곱 살짜리가 얼마, 힘이 있겄어? 막 남자가 막 끄신게 할 수 없이 끌려갔지, 내가. 끌려가갖고 인자 어디만큼 가다가, 또 생각을 했어. 우리 어머니한테 내가 어디 갔다 옹께 기다리지 말라고 헐라고 갔더니, 못 가게 해. 절대 못 가게.
- 요시미 요시아키·양노자 면접-1, 00:00~02:02
이순덕은 남자에게 이끌려 이리읍에 있는 여관까지 걸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십여 명의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녀들 역시 모두 비슷한 처지의 농가의 딸로 아무도 무엇 때문에 어디로 끌려가는지 몰라 울고 있었다. 다음날 이순덕을 데려 온 조선 남자는 보이지 않고, 대신 군인 복장을 한 남자들이 여자들을 인솔했다. 이순덕과 여자들은 이리역에서 기차에 태워져 상하이역으로 연행되었고, 그곳에서 또 다시 트럭으로 일본 육군 주둔지로 보내졌다. 군용 텐트 근처에 멍석 벽에 싸리를 엮어 만든 작은 오두막이 있었는데, 함께 온 여자들은 한 사람씩 그곳에 흩어져 들어갔다. 여자들은 군복과 같은 색의 상의와 몸빼를 지급 받았고, 606주사를 맞았다. 조선인 군인에게 무슨 주사냐고 물었더니 임신을 하지 않기 위한 주사라고 말했다. 606주사는 ‘위안부’ 여성들의 성병 관리를 위해 처방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해방 후 결혼을 하고도 아이를 낳지 못했던 이순덕은 끝까지 이 주사로 인해 그리된 것이라 믿었다.
위안소로 동원된 뒤 이순덕이 처음 상대한 군인은 미야자키라는 이름의 나이든 장교였다. 그는 이순덕을 ‘가네코’라 부르며 함께 자자고 했다. 싫다고 하여도 억지로 넘어뜨려 범했고, 그로부터 사흘 간 매일 찾아왔다. 처음엔 미야자키만 상대하였으나, 이후로 많은 병사들이 행렬을 지어 찾아왔다. 저항하면 맞고 차이기 때문에 당하는 채로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식사 시간에는 다른 여자들과 대화는 물론 눈을 마주치는 일조차 금지되었는데, 그러한 식사마저도 군인이 몰려오면 거를 수밖에 없었다. 오두막 앞에는 늘 보초병들이 있었기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해방을 얼마 앞두지 않았던 즈음, 한 장교가 자신 외에 다른 군인을 받았다고 이순덕을 폭행했다. 그는 칼을 뽑아 이순덕의 등을 내리쳤고, 군화로 배를 걷어찼다. 그때 다친 배와 등의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 흉터와 후유증으로 평생 이순덕을 고통스럽게 했다. 이처럼 비참한 감금 생활이었지만, 이순덕은 미야자키 장교처럼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주던 사람에 대해서도 곧잘 이야기한다. 젊은 시절 자신의 미모를 자랑하고,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군인에 대해 좋게 말하는 이순덕의 모습에서는 고통스러운 위안소에서 보낸 젊은 시절에 대한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이 엿보인다. 누구에게나 아름답고 찬란하게 기억되는 청춘이 있기 마련일 텐데, 이순덕은 그 소중한 인생의 한 시절을 위안소에서 보냈다. 일각에서는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증언자의 회고를 악의적으로 왜곡하려 들지만, 오히려 열아홉, 스무 살의 나날을 평생을 따라다닌 신체적·정신적 고통과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는 증언자 삶의 비극에 공감하고 연대해야 할 것이다.
이순덕은 해방이 되어 귀향하는 조선사람들 틈에 끼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처음엔 해방이 되었는지도 몰랐는데, 위안소 뒷길에서 조선인들의 환호성을 듣고 알았다고 한다. 위안소에 함께 있던 언니에게 같이 떠나자고 했지만, 언니는 아파서 길을 나설 수 없었다. 이순덕은 아픈 동료를 두고 혼자서 귀향길에 올랐다. 사람들을 따라서 화차를 타고, 차가 없는 곳에서는 걸어서 고향까지 왔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남동생은 이모가 돌보고 있었다. 동생이 어디 있다 왔냐고 물어서 부잣집에서 식모살이 하다가 왔다고만 대답했다. 이후 이순덕은 두 번의 결혼을 하지만, 남편에게도 자신의 피해 사실을 말하진 못했다. 두 번째 남편이 살아 있을 때 관부재판의 원고로 참여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남편은 어렴풋이 이순덕의 과거를 추측했을지 모르지만 이순덕 스스로가 가족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은 적은 없다.
위안소에서 돌아온 이순덕은 남자라면 질색이었지만, 이모의 설득에 중매 결혼을 했다. 이순덕이 결혼을 하였던 것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여성이 가부장제 가족제도에 편입되지 않고 혼자 살아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귀향 후 일 년 정도 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자와 첫 번째 결혼을 하였고, 그와 사별 후 다시 두 번째 결혼을 했다. 두 남자 모두 전처가 낳은 아이를 하나씩 데리고 있었는데, 세 살 때부터 이순덕이 키운 두 번째 남편의 딸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이순덕과 모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순덕은 아이를 낳지 못했던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고, 이는 위안소에서 겪은 일, 특히 위안소에서 이 주마다 한 번씩 놓았던 606주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남편과 사별하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쉼터 ‘우리집’으로 이주하여 안정적인 거주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가족 혹은 ‘피붙이’에 대한 아쉬움을 떨칠 순 없었던 듯하다. 위안소에서 겪은 폭력은 정신적·신체적 상흔만 남긴 것이 아니라, 가족을 구성하고 그들과 삶을 나눌 수 있는 소박한 꿈조차 앗아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