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피해자 증언 영상 해제 및 콘텐츠화 연구



"나의 이 상처를 보아라”



예정된 진술은 곧 끝났다.

하지만 이순덕은 통역사 금주 씨에게 뭔가 아직 할 말이 있다고 한 뒤,

이번에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일본어로 판사를 향해 호소하기 시작했다.

“내 이 상처를 좀 보아라.” 할머니는 상의를 판사 쪽으로 돌려 보였다.

할머니의 육성, 그것은 내가 늘 들어왔던, 재일 1세 특유의 한국어 악센트의 일본어와 같았다.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생생한 목소리였다.

- 저자 불명, 「관부재판방청기(關釜裁判傍聽記)」, 『관부재판 뉴스(關釜裁判ニュース)』 32호, 2000.7.9.


흩어진 증언, 부재하는 이름


1991년 ‘위안부’ 피해를 신고하여 십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부산 「종군위안부」·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죄청구소송’, 곧 ‘관부재판’의 원고로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과 보상을 추궁했던 이순덕은 수차례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증언을 했다. 이순덕의 증언은 피해자 신고 서류에, 또 관부재판에 관한 여러 기록들에 남아 있지만, 그것은 찾아보기 어려운 행정 서류에 간단히 요약되어 있거나, 일본어로 쓰인 지원 단체의 소식지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다. 이순덕은 ‘위안부’ 운동 초기부터 증언자로 나섰지만, 의외로 그의 삶 전체를 정리한 증언 텍스트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연구자들이 펴낸 증언집(1~6권)을 비롯하여 여러 형태의 구술자료집, 인터뷰집, 평전 등에서도 좀처럼 이순덕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는다.


증언 채록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피해자 중에서도 고령이었던 데다 위안소에서 당한 폭력의 후유증으로 건강마저 좋지 않았던 이순덕은 조사자와 소통을 원활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순덕은 십 년이나 지속된 관부재판의 원고로 참여하며 증언을 반복해야 했던 것에 지친 듯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한국과 일본을 왕복하며 위압적인 재판정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증언을 하였음에도 ‘기각’이라는 모멸적인 결과를 마주하였다면, 증언을 반복하는 일은 더욱 힘들었을 테다. 더하여 재판에서 증언한 내용이 충분히 공유되지 못하여 새로운 조사자들에게 또 다시 처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증언집에 부재하는 ‘이순덕’의 자리는 어쩌면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증언을 너무 가볍게 여겨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무수하게 흩어져 있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부재하는 이순덕의 삶을 재구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