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못한 원혼들과 더불어
강순애의 증언이 과거에서 현재로, 전장에서 해방 후 한국으로 곧잘 연결되듯, 그의 삶에서 ‘위안부’ 피해, 그리고 전쟁의 상흔은 단절된 과거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해방 후 미군의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온 강순애는 먹고 살기 위해 공장 노동자로, 산부인과 조수로 전전하였다. 강순애는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기도 벅찼지만, 전장에서 죽은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낯선 남양의 섬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조선인 병사들의 가족을 찾기 위해 속초로, 포항으로 헤매 다녔다. 또, 1995년 취재진과 함께 일제하 해외희생자의 발자취를 찾는 여정에 함께 했을 때엔 자신을 ‘딸’처럼 보살펴 주었던 인솔 장교의 추모제를 지내주기도 했다. 한때 신을 모시며 무속인으로 살기도 했다는 강순애는 귀환 후에도 과거와 중첩된 현재를, 전쟁의 원혼들과 더불어 남은 생을 살아냈던 게 아닌가 한다.
그런 점에서 1992년 12월 9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전후 보상에 관한 국제 공청회>에서 강제 동원을 부인한 일본 정부를 향한 강순애의 외침에는 오직 그만의 울분만이 담겨 있었던건 아니지 않았을까 한다. 한 동네에서 동원되었으나 생사조차 알지 못하게 된 여자아이들, 침몰한 배에서 끝내 구조되지 못했던 금옥과 끝순, 가미카제로 투입되어 목숨을 잃은 조선인 병사 양은철과 임창수, 두고 온 딸을 생각하며 강순애를 보살펴 주었던 ‘다케오 오또상’, 그리고 어쩌면 혐오와 차별의 언어로밖에 표현될 수 없었지만 강순애의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던 오키나와 출신의 병사들까지. 생존자 강순애는 귀환하지 못한 이들을 기억하며, 전쟁의 원혼과 더불어 증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본 정부 말 한마디가 너무 괘씸하고 이가 탈탈 갈리고 · · ·
왜 강제로 끌고 간 사실이 없다, 강제로 안 끌고 갔다, 왜 이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너무나 내 가슴에 한이 맺혀서 · · ·
-<살아있는 동안에 말하고 싶었다>의 강순애 증언 중에서(17:14~2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