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파라오의 전장(戰場)에서
구사일생으로 강순애가 도착한 곳은 파라오 전장이었다. “가도 가도 섬이고 하늘하고 푸른 바다만 보이는” 남양군도의 파라오는 현재의 팔라우 공화국이다. 파라오는 필리핀과 사이판 사이에 위치한 섬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제국의 위임통치령인 남양군도의 일부가 되었다.

1940년 파라오 풍경 위에서부터 남양청 청사 정문, 남양청 파라오 청사, 파라오 제도 점령 기념비와 기념수, 파라오 코롤 거리
(南洋廳長官官房調査課 編, 『南洋群島現勢 : 昭和15年版. 1940』, 南洋群島文化協 會, 1940, p. 31.)
일본은 파라오 코롤섬에 남양청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일본제국의 동남아시아 진출의 거점이었던 파라오는 수많은 조선인 노무자가 강제 동원된 곳이기도 하다. 1940년대 태평양 지역에서 미일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면서 미국은 파라오를 공습했고, 여러 차례의 치열한 전투 끝에 1944년 11월 섬을 점령했다. 파라오는 태평양전쟁 최대 격전지 중 하나로, 1944년 9월에서 11월까지의 펠렐리우 전투에서 미군과 일본군 모두에 약 1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강순애는 전황이 악화되기 시작할 무렵 파라오에 도착했던 듯하다.
극단적인 폭력이 위계와 차별을 만들어내는 전쟁에서 강순애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강순애는 파라오로 이송되는 배에서 조선인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15세에 논에서 메뚜기 잡다가 징병되어 만주에서 10년 넘게 고생하다 남양군도로 온 청년이었다. 조선인 오빠들은 나이 어린 강순애를 안쓰러워하며 챙겨주었고, 침몰하는 배에서 강순애를 극적으로 구해내기도 했다. 또, 강순애에게 꼭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의지를 불어 넣어주기도 했다. 그들은 조선인으로서는 흔치 않게 대위 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결국 전세가 기울고 전쟁이 끝나가던 무렵 폭발물을 메고 미국 배로 돌진하여 죽었다고 한다.
"어느 군인들이 둘이서 쑥덕쑥덕 하더만은 야..꼬마야 꼬마야 그래요. 어머 조선말을 한다. 조선 군인입니까 카니께, 조센징입니까 카니께, 조선히타 치상 하니께 오케이 조선히타치상이래. 오빠 하니께, 오빠 소리는 할 줄 알았거든."
(T25-1, 28:54~30:44)
“결심해라. 너희는 꼭 살아나가야 된다. 어야든지 너희는 살아나가야 한다. 아버지 어머니 다 노무제로 그리 되어버리고 너희는 꼭 살아나가야 된다. 살아 나가야 된다. 우리는 죽어. 우리는 죽어 그래 쌌더라고”
(T25-1, 14:50~15:05)
그러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강순애가 사람들과 보살핌의 관계만을 맺을 수는 없었다. 배가 난파되어 판자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강순애는 다리에 쥐가 나자 같이 있던 오키나와 군인들을 밀어버리고 다리를 펴고 앉았다. “새까만 놈들이 있어서 어디서 왔냐 하니께 일본 사람은 아닌데 오키나와 군인들”이었다. 강순애는 그들은 싸움하러 가는 것이니까, 우리 조선 어린 애들을 이유 없이 잡아 왔으니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9세기 후반 일본의 식민지가 된 오키나와 사람들을 일본 사람이 아니라고 인식하면서도 일본 군인으로 등치시키는 강순애의 말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력 하의 식민지인들의 복잡한 관계를 생각해보게 한다. 또한 ‘일본군’이 단일한 주체가 아니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당시 일본군에는 본토 출신의 일본인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조선, 대만 등 식민지 출신의 사람들과 파라오의 선주민들이 군인 및 군속으로 있었으며, 강순애 역시 전세가 나빠지자 ‘위안부’이면서 간호원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공습이 격화되어도 위안소는 운영되었다. 본섬에서만이 아니라 7~8개의 섬을 다니며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동시에 간호사의 일도 해야 했다. 강순애는 붕대, 진통제, 소화제, 설사약 등을 가지고 군인들과 함께 이 섬 저 섬을 다녔다. 낮에는 비행기가 있어 위험하니 달도 없는 어두운 밤에 주로 이동했다. 이러한 전장에서의 생활은 강순애의 몸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겼다. 파편이 몸에 박히고, “강간당해 앞뒤가 다 뚫리고”, 고문으로 팔의 신경이 다 끊어졌다. 비행기를 피해 도망치다가 온몸에 가시가 박혔고, 이도 다 빠졌다. 열대 지방의 더운 날씨에 몇 번이고 터지고 깨진 발바닥은 지금도 겨울이나 여름이나 “자갈같이, 바늘같이” 아프다.
고되게 살아내느라 잊은 줄 알았지만, 엄청난 폭력의 경험은 마음 깊이 남아있었다. 1990년대 다시 남양군도를 찾은 강순애는 그곳에 가니 “총소리 나샀고 비행기 소리 나싸서 방금 쳐들어오는 것” 같았다고, “칼 들고 쫓아오는 것 같고, 약 도둑질 해다 달라는 것 같고, 날 때려 패는 것 같”았다고 한다. 전쟁의 화염이 눈에 선하게 떠올라 무서워서 미치겠더라고 호소한다. 비행기 수 만 대가 날아오면 이를 피해 숨어야 했던 경험. 조선사람은 굴에다 몰아넣고 죽인다더라 하는 소문. 전장의 기억을 떠올리며 강순애는 두려움과 분노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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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중에 겪은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 <Tape4, 02:05~04:40> | 억울함과 속상함을 토로하는 대목 <Tape1, 27:40~30:00> |
강순애의 분노는 과거의 경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의 상황에 대한 감정으로 이어진다. 강순애는 남양군도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중간 중간 현재의 삶에 대해 울분을 터트린다. 고독하고 힘들게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한, 누구 하나 챙겨주지 않는다는 서러움, 아무도 자신의 심정을 몰라준다는 억울함이 증언 곳곳에 스며 있다. 국민기금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말만 그럴듯하고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않는 정부에 대한 원망 속에서 강순애는 지원단체와 활동가,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털이 많고 냄새가 많이 난다거나, 남양군도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 짐승 같았고 무서웠다는 말을 쏟아내기도 한다. 강순애의 말에는 낯설음과 두려움, 혼란스러운 적대감에서 비롯된 차별과 혐오가 묻어 있다.
이는 강순애가 겪은 전장의 경험이 가해자와 피해자, 군인과 민간인, 우리 편과 적으로 분명히 구분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강순애는 15살부터 잡아간다고 했는데 아직 14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자신을 잡아간 것도 억울하고, 잡혀가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화가 난다. 일본 사람들도 싫지만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며 집도 땅도 다 뺏어갔던 동네 사람들에게도 분노한다. 사촌오빠에게 속아 ‘위안부’로 팔려온 일본 여성과 위안소에서 포주 노릇을 했던 이북 여성의 이야기를 전하는 강순애의 증언은 전쟁이 만들어낸 폭력이 착취와 피착취, 가해와 피해로 단순하게 이해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강순애의 증언에서 마주하게 되는 분노와 원망은 이러한 중첩된 폭력과 그로 인한 모순적 억압 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