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피해자 증언 영상 해제 및 콘텐츠화 연구


  중첩되는 궤적: 선박의 이동과 ‘위안부’의 이송

"히로시마서 아침에 일하러 갈라카니. 일본 여자들이 불러. 나미짱 나미짱하고 부르더라고. 모치를 주더라고. 찹쌀모치로. 그래 앞에 문을 보니께, 솔잎깨비를 이래 붙여놓고 밀감을 이래 붙여놨는데 일본 놈은 설이래야 그렇게 붙이거던. 일본 놈한테 찹쌀모치 얻어먹고 왔으께. 여로 설에 나온게 딱 맞아요. 일월달이더라고. 일월달” 

(T25-1, 22:14~23:56)


1942년 1월 초로 추정되는 어느 날 새벽, 강순애는 여자들 35명과 함께 ‘미토마루(水戸丸)’라는 배를 타고 남양군도로 향했다. 강순애는 당시에 군인, 군속이 탄 배와 더불어 모두 여덟 척이 출항했고, 배에 같이 탄 군인들은 육군이었다고 기억한다. 배에서는 냄새가 많이 났다. 이따금 배를 타고 가다가 사이렌 소리가 나면 빨리 갑판으로 올라가서 자세를 잘 잡아야 했다. 그래야 배가 안 넘어간다고 했다. 배를 타고 가면서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 같은 장교에게 군가를 배웠다. 증언 영상 속 강순애는 증언을 하다가 일어나서 허리에 손을 얹고 몸을 좌우로 흔들며 군가를 부른다. 이 노래는 로에노우타(露営の歌)라는 유명한 군가의 몇 소절로, 본래 “이기고 오리라/ 용감하게 맹세하고 나라를 떠난 까닭에/ 공을 세우지 않고 서 죽을 수 있으랴/ 진군 나팔소리 들을 때마다/ 눈앞에 떠오르는 깃발의 물결 (勝ってくるぞと勇ましく/ 誓って國を出たからは/ 手柄入てずに死なれよか/ 進軍 ラッパきくたびに/ 瞼に浮かぶ旗の波)”이라는 가사로 불렸다.


"갓테 구르조토 이사마시쿠~ 치캇떼 구니오 데 테카라와~(勝ってくるぞと勇ましく~ 誓って國を 出たからは~ , 이기고 오리라~ 용감하게 맹세하 고~)그 군가는 배우기 쉬와요.” 

(T25-1, 28:54~30:44)


히로시마를 떠난 지 이틀 만에 미토마루는 어뢰에 맞았다. 새벽 세 시쯤이었다. 사이렌이 울렸고 군인들은 줄을 타고 갑판 위로 올라갔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자 뱃머리로 가서 바다로 뛰어내리라고, 뛰어내리면 산다고 했다. 배가 침몰하면서 ‘우르르’ 소리가 났다. 바다에 떨어졌을 때 배에서 만난 조선인 오빠들(조선인 병사들)이 올려주어서 강순애는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바다에는 히로시마에서 딴 밀감이 둥둥 떠다녔다. 구조정을 기다리면서 배가 고파 밀감을 껍질째 먹었다. 조선인 오빠들이 근처의 섬에서 해군들이 구조하러 올 거라고 강순애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강순애와 함께 뛰어내린 금옥이와 끝순이는 끝내 구조되지 못했다. 배가 가라앉으면서 그녀들도 함께 물속으로 휩쓸린 듯했다. 강순애는 무릎 뼈가 부서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고, 구조된 후에 ‘가이군시마(海軍島)’로 불리던 인근 섬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남은 33명의 여자들은 해군 부대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새벽, 오사카마루(大阪丸)를 타고 목적지 파라오로 향했다. 곧바로 가면 일주일이면 도착할 거리인데, 어뢰를 피하느라 한 달 사흘이 걸려 도착했다.

“그 배가 이틀 가다가 파산 되가지고 히로시마에서 떠나 가지고 밤 새벽 세 시 나 네 시 그 정도 됐어. (중략) 사이렌이 나발 불어서 쫓아 올라가니까 데끼(敵)가 왔다 카더라고. ‘빵’하는데 막 배가 막 그 자리에 짝 서는데 우웅 우웅 웅 웅 웅 막 그 안에 서가 맥을 못 잡아 고대로 갔다 왔다 갔다 왔다. (중략) 어디서 전쟁이 났는지 비행기도 없고 근데 밑에 저저 미국 잠수정이 와 가지고 ***에 들이받은 거야. (중략) 물이 새까맣게 뛰어내렸어.” 

(T25-1 04:02-07:47)

서류꾸러미에서 ‘오사카마루’ 관련 복사물을 보여 주며 증언하는 강순애 (T25-1, 22:09)
서류꾸러미에서 ‘오사카마루’ 관련 복사물을 보여 주며 증언하는 강순애 (T25-1, 22:09)

강순애가 소장하고 있던 미토마루 관련 일본어 자료 (P7-0026_09/서지사항 없음)

미토마루(水戸丸)
미토마루(水戸丸)
오사카마루(大阪丸)
오사카마루(大阪丸)

미토마루와 오사카마루
강순애가 소장하고 있던 미토마루 자료에는 미토마루의 침몰일이 602쪽에는 1942년 1월 3일로, 507쪽에는 1944년 4월 16일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일본의 전몰선 관련 자료들에는 7,061톤 급의 우편선 미토마루가 미잠수함 Paddle(SS-263)의 어뢰 공격으로 1944년 4월 16일 새벽 2시 10분에 인도네시아 암본(Ambon)의 북서쪽 182km 부근에서 침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몰선과 해원의 자료관(戦没した船と海員の資料館) 홈페이지에는 선박의 침몰 위치, 탑승자와 사망자 수가 나와 있다.²
강순애의 기억에 따르면 미토마루의 침몰 시기는 1942년 1월 초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 파라오로 향하는 선박의 침몰사고가 빈번했기 때문에, 강순애가 자신이 승선했던 배의 이름을 다르게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전몰선을 기념하는 모임(戦没船を記念する会)의 태평양전쟁시기의 소실 함선 명세표(太平 洋戦争時の喪失船舶明細表)와 선력(船歷)을 비교해 보았을 때, 1942년 1월에 육군이 승선하여 파라오로 향하다가 어뢰 공격으로 침몰한 배는 모두 네 척이다.³
한편, 미토마루 침몰 후 강순애가 갈아탄 오사카마루는 3,740톤급 우편선으로 1944년 5월25일, 적의 기동대가 접근해오는 것을 피해 사이판에서 파라오를 향하던 중 야부 섬 북서쪽에서 어뢰 공격을 받아 오후 2시 22분에 침몰했다. 승선자 824명 중 97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순애는 히로시마를 떠나 팔라우로 향하는 이송과정에서 침몰하는 선박에서 살아남은 경험을 매우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남양군도로 향했던 선박에 의한 이송과 귀환과정에서 ‘위안부’의 사망자 수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매우 드물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강순애의 증언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강순애의 증언은 군인, 군속 혹은 노무자였던 침몰선 생존자들의 증언이나 선원 수첩, 징용선의 선력(船歷) 등의 공적 기록물과의 교차 검토를 통해 당시의 정황과 피해 상황의 윤곽을 조금이나마 더 세세히 드러낼 수 있다는 의의를 지닌다. 강순애의 증언은 낯선 바다 한가운데서 격침되는 배와 함께 숨을 거두었을 많은 여성들의 경험을 바다 밑에서 건져 올릴 작은 단서가 된다.

1942년 1월에 침몰한 선박에 대한 명세표
1942년 1월에 침몰한 선박에 대한 명세표

1942년 1월에 침몰한 선박에 대한 명세표. 강순애가 승선한 배는 아니지만, 침몰선의 위안부 탑승자와 사망자 기록이 남아있는 육군 자료로는 『 선박운송에 관한 조난부대 자료(船舶輸送間における遭難部隊資料)』 (陸軍運輸部残務整理 部, JACAR Ref.C08050112500、画像32-35)가 있다. 이 자료의 기록에 따르면, 이마바리마루 (今治丸)가 출항 직후 1944년 9월 16일 일본 측 자료로는 잠수정의 공격으로, 미국 측 자료로는 공습으로 침몰했다. 이 선박에는 이동 중이던 육군 관계자 162명 이외에도 점령지에서 모집한 노동자 956명과 위안부 92명이 승선하고 있었고, 그중 육군 군속 1명과 노동자 308명, 위안부 26명이 사망했다. 또한 1961년에 후생성에서 출간한 『육군징용선박행동조서(陸軍徴用 船舶行動調書)』에는 미이케마루(三池丸) 승무원이 위안부로 동원된 조선인 여성들의 목격담이 실려있다. (히라오 히로코, 앞의 글, 489쪽에서 재인용.)


2) http://www.jsu.or.jp/siryo/map/new_solo/halmahera/halmahera.html 

3) 이에 관해서는 전몰선과 해원의 자료관(戦没した船と海員の資料館) 홈페이지 및 전몰선을 기록하는 모임(戦没船を記錄する会) 홈페이지 참조 

4) http://www.jsu.or.jp/siryo/map/allmariana/wcaroline/parau/parau_z/parau_z.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