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조선을 왕복했던 유년
강순애는 1927년 일본 교토(京都) 근처에 있는 시가(滋賀)현 히코네(彦根)시에서 태어났다. 마산에 살던 아버지는 일본인에게 고용되어 임신한 어머니, 삼촌과 함께 일본으로 가 교토(京都), 고베(神戸), 나가사키(長崎), 후쿠이(福井), 오사카(大阪), 동경(東京) 등지를 다니며 길을 닦고 기찻길을 놓는 측량 작업을 했고, 때로는 탄광에서 조선인 갱부들에게 일을 시키는 ‘오야가타(親方)’를 맡기도 했다. 어머니는 ‘지카다비(작업화)’나 ‘게다(나막신)’ 끈을 짜는 공장에서 일하거나, 탄광 노동자들에게 밥을 해주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그러나 부모의 노동에도 불구하고 강순애는 형편이 어려워서 학교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어머니가 다니던 공장 주인의 야학에 잠시 가보았을 뿐이다.
강순애는 열 살이 되던 해 부모를 따라 조선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갔고, 열 세 살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열 네 살에 마산으로 이주했다. 강순애가 열 네 살이 되던 1941년은 순사가 처녀들을 잡아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 때였다. 그리하여 강순애는 할아버지가 화장막지기로 있는 완월동 화장굴에서 20여 일간 숨어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린 동생이 찾아와 자기는 “식민지”(황국신민서사를 뜻함)를 못 외워서 배급을 타지 못하니 잘 외우는 누나가 배급을 타 달라고 졸랐다.
“누나, 누나, 맨발로 다니니께는 일본놈들이 고지껭이라 칸다, 거지라 칸다. 누나, 배급준데. 고무신 배급준대. 식민지 부르면 배급준대. 누나야”
(T25-2, 00:00~03:04)
“배가 고프니 어떻게 해. 배가 고픈데 어떡하냐고. 그래서 우리 엄마가.. 응. 배급 많이 준다 한다고 꼬이지 말라 카는데 그래 동네 반장들하고 경찰서서 와 가지고 저 배급 많이 준다고 가라고. 일본서 노무자로 갔다가 쫒겨왔다 카믄 배급 많이 준다고. 그래 갔어”
(T25-2, 04:45~05:47)
“고고쿠 신민노 치까이. 이찌 와레라 고흔 신민노나리, 그게 젤 중요하고, 그거 부르고 애국가 부르라는 거야. 기미가요. 그래 불렀지. 기미가..아..요..오 와..”
(T25-2, 06:41~07:09)
강순애는 당시에 황국신민서사를 못 외우면 배급을 타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황국신민서사(皇国臣民ノ誓詞)’는 1937년 일본 제국이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들에게 외우게 한 맹세이다. 학교를 비롯한 관공서, 은행, 공장, 상점 등의 일터와 여러 모임에서 제창되었다. 아동용이 따로 만들어졌는데, 강순애는 이것을 외운 것으로 보인다.
<황국신민서사> 아동용
배급 받은지 이삼일이 지난 아침, 헌병 세 명과 순사 한 명이 찾아왔다. 헌병대에 가서 “식민지”를 외우고 기미가요를 불렀던 날, 헌병이 배급을 후하게 주고 집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강순애는 이를 매우 안타깝게 회고한다. 화장막에 숨어 지내던 강순애가 헌병들 눈에 띈 계기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들이닥친 헌병과 순사에 붙들려 강순애는 신마산에 있는 헌병대 창고로 끌려갔다. 며칠이 지나 헌병들의 인솔로 밤차를 타고 부산으로 떠났다. 함께 간 여자들은 14명 있었는데, 모두 또래였다. 화장실까지 따라오는 헌병들의 감시 속에서 여자들은 부산에 도착하였고, 인솔자를 따라 인근의 대동여관으로 들어갔다. 간판이 한자로 쓰여 있어서 읽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여관 이름을 알 수 있었다. 헌병들은 여자가 35명이 되어야 한다고 하더니 동래와 대구에서 여자들을 금방 잡아왔고, 그중에서도 강순애가 제일 어렸다. 스무날 정도 머물렀던 대동여관에서는 헌병들이 삼교대로 보초를 섰고, 부산항에 연락선을 타러 갈 때는 헌병 15명 정도가 인솔했다. 오후 대여섯시에 연락선을 탔는데, 시모노세키에 떨어지니 새벽이었다.
시모노세키에서 다시 열차를 타고 히로시마에 도착하자, 헌병들은 누런 군복을 입은 군인들에게 강순애와 여자들을 인계하고 돌아갔다. 히로시마에서는 일본어 연습도 하고, 노래도 배웠는데, 그때 마이코(舞子)라는 이름을 부대에서 지어주었다. 마침 밀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던 때라 히로시마에서는 사방이 온통 노랬던 기억이 있다. 여자들은 아침마다 출석을 알리고, 밀감과 무화과를 따는 일을 해야 했다. 강순애가 갔다는 히로시마의 군부대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히로시마의 우지나(宇品)가 육군의 해운기지이자 전시 하 선박 수송 사령부가 배치 되었던 항구였던 점을 미루어보면, 강순애는 우지나 부근의 부대에 머물렀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대형 징용선에 대한 모든 운항 지시도 우지나에서 내려졌다.¹
1) 히라오 히로코, 「통곡의 항로-일본군 ‘위안부’를 나른 육군 징용선」, 일본의 전쟁책임 자료센터, 『일본의 군‘위안부’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 482쪽